이제 ‘인생 단상’ 시리즈의 마지막인 좋은 죽음과 그 이후를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 한다. 당연하게도 필자는 죽을 뻔한 적은 있어도 죽어보지도 못했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그러니 간접적으로 밖에 말할 수 없고 독자 제위의 생각은 필자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전제하에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필자가 이에 대해 쓰려고 할 때 많은 친우들이 극구 말렸다. 왜 논란의 여지가 많고 알지도 못하는 영역을 굳이 쓰려고 하냐고...... 그냥 인생관점이라고 앞에 쓴 글들도 어차피 ‘관점’이라는 측면에서 어차피 정답은 없는 것이고 독자들과 생각을 나눠보자는 화두에 불과하니 마무리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해서 쓰는 글이니 독자제위의 너른 양해를 부탁 드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좋은 죽음, 좋다와 죽는다. 이 양립 불가능한 두 단어가 합쳐진 ‘좋은 죽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는 순간과 후회 없는 삶의 두 가지로 나눠서 얘기하는 것 같다. 먼저 죽는 순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비교적 적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혹은 보다 나은 경우 손을 잡는다던가 하는 스킨십(Skinship)과 함께 죽는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죽음을 지나치게 터부시해서 죽음을 직면하지 못해서 손을 잡고 임종을 지키는 문화 같은 건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엘리트주의의 부작용인지 호스피스(Hospice) 전문간호사가 임종을 지켜주면 그나마 다행인 수준이고 아이들은 조상들의 임종을 지키는 경험과 배움이 없다. 그렇다면 후회 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는 좋은 삶(well-being)의 마무리로서의 좋은 죽음(well-dying) 즉, 좋은 삶의 연속선상에서 좋은 죽음으로 후회 없는 삶을 산 후회 없는 죽음이라고들 한다. 여기서 후회란 사람마다 다를 것이므로 너무 주관적이므로 죽었다 살아난 다양한 사람들의 정보가 필요한데 다양한 사람은커녕 단 한사람도 없다.
따라소 본 글의 방식은 죽음을 옆에서 지켜본 분들과 고인을 보내고 남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독자들과 간접적으로 얘기를 나눠 보고자 한다. 생명체는 말 그대로 생명을 가진 존재이므로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피할 수 없다는 공통성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생명체 가운데 유독 사람(인간)의 자살율이 높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도 우리나라는 출산율은 최저인데 자살율은 왜 최고일까? OECD 38개국 연령표준화 평균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11.1명인데 우리나라는 23.6명으로 압도적인 1위이고, 2023년 기준 출산율은 0.72명, 금년 2024년은 0.68% 정도로 더 하락한 것으로 추정되어 OECD 평균 1.58명대비 압도적인 최하위이다. 왜 그럴까?
많은 사람들이 생존에 대한 본능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종족 번식에 대한 욕구라는 것이다. 먼저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 측면에서, 인간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라는 것을 만들었고 종교의 죽음 극복 방식은 단선론인 영생과 순환론인 윤회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단선론은 영생을 추구한다. 즉 당장 눈에 보이는 죽음은 천국이나 지옥에 가서 내세를 영원히 사는 시작점일 뿐이고 이생에서 착하게 산 사람은 죽음 이후 천당같이 좋은 곳에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고 나쁘게 산 사람은 지옥 같은 곳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천당 가서 살게 될지를 써 놓은 책이 성서라고 본다. 기독교, 이슬람교 등 대표적인 아브라함 계통의 서양 종교들이 그렇다. 반대로 동양의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등 인도계 종교에서는 윤회론을 죽음 극복의 기제로 본다. 즉, 육체적으로 죽은 자는 끝이 아니라 내세에 다시 태어나되, 이생에서 착한 일을 하며 살면 내세에 좋은 집에 인간으로 태어나 좋은 인생을 살 기반이 가지고 태어나고, 나쁜 일을 하면 내세에 인간이 아닌 것으로 태어난다. 그러니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전생에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니 함부로 죽이면 안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종교란 죽음의 극복을 위한 장치로서 어느 종교나 그 극복 기제를 가지고 있다.
다음은 종족 번식이라는 측면을 보면 혹자는 인간은 숙주일 뿐, DNA가 영생을 살아가며 이를 위해 인간은 성욕을 통해 2세를 생산하는 것이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또 혹자는 소멸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속성상 누군가의 기억속에는 남아 있기 위해 자식을 낳고 제사(서양의 경우 Memorial Day)를 철저하게 지내도록 하여 극동 아시아에서는 유교가 마치 종교처럼 여겨지고 있다. 유교는 종교도 아니고 정작 공자는 제자 계로의 ‘어떻게 귀신을 섬겨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랴?(味知生焉知死)’라고 했는데도 말이다. 어쨌든 모두가 아는 아주 오랜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에서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기억되어 죽음이 소멸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속에 계속 남아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강력한 삶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높은 이유는 뭘까? 우리나라는 1990년대~2000년대까지 약 20년 동안 OECD 국가들의 자살율이 꾸준히 감소한 반면 우리나라는 급격히 상승하는 변화를 겪었다. 처음 OECD평균을 넘어선 것은 IMF사태 때인 1998년 이지만 상승의 시작은 1990년대 초부터이고, 2010년대에는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는 IMF 당시인 1998년 자살률의 OECD의 추세선을 넘어서는 자살률의 급등에서 많은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당시 살인적인 부도율, 실업률과 이자율로 수많은 실업자와 자영업자들의 자살이 이어졌다. 우리나라는 일본식 고용으로 평생 직장 개념이 몸에 벤 상태에서 IMF로부터 구조조정과 유연한 노동시장이라는 듣기 좋은 말로 권고를 받았으나 실제로는 과잉공급 산업의 기업과 노동자를 퇴출시켜 수요에 맞는 공급구조를 갖추라는 잔인한 요구였다. 말그대로 평생 직장에서 하루 아침에 길거리에 나 앉은 경영자와 노동자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는 자살률의 급등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희망이 없으면 삶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다. IMF 시절 학습효과로 희망이 없다 싶으면 자살하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다. 실제 어느 심리학 연구결과에 따르면 자살이라는 주제의 뉴스가 많아지면, 즉 자살에 대한 미디어 노출이 많아지면 자살률도 높아진다고 한다. IMF 때 높아진 자살률은 이후 잠시 OECD 추세선으로 낮아지는가 싶더니 닷컴버블의 붕괴와 함께 다시 높아지기 시작하여 이후 세계적인 금융위기(리먼 브라더스사태, 혹은 서브 프라임모기지사태) 때 가속도가 붙어 2010년대 초 정점을 찍고 이후에는 여전히 다른 나라에 비해 높지만 서서히 세계적인 추세를 따라 하락하고 있으나 여전히 세계 1위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다른 나라만큼이 아닌 훨씬 높은 자살률과 훨씬 낮은 출산율을 보일까? 우리나라의 특성을 분석할 때 반드시 생각 해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역동성이다. 다른 나라들은 산업혁명을 거치며 200여년 걸려 이룬 경제성장을 전후 50여년에 걸쳐 이루어 내고 20여년 만에 다른 나라를 제치고 명실 상부한 선진국에 진입해 버린 그 역동성 말이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에서 변화를 먼저 받아들이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or) 역할에 익숙하다. 그리고 동양적인 특성상 ‘나’보다는 ‘우리’라는 개념에서 알 수 있듯이 집단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 금년 1월부터 남성 자살자수가 확 늘어난 이유를 지난해 12월 마약투약 혐의를 받던 이선균배우 자살에 따른 베르테르 효과로 보기도 한다. 즉 전염성이 매우 강한 정신병증으로 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림 1> 인구 10만명당 자살률 장기 추이
(단위 : 명/10만명)

자살에 대해서 보다 일반화 해보기 위해 자살의 원인을 살펴보면, 자살의 80%는 우울증에 기인하며 기타 술, 마약 등 중독에 의한 경우와 공황장애 등 불안장애에 기인한다. 또한 조울증 환자의 20%는 자살 한다고 한다. 자살을 생각하는 뇌의 부위는 공포와 불안에 대해 학습하고 반응하는 편도체라고 한다. 불안감이 들 때 쾌감과 성취감 등 보상기능을 담당하는 복측 선조체가 제기능을 못하고 감정의 과잉반응을 조절하는 등측 전대상피질이 과잉반응을 조절하지 못하면 깊은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이 때 반추시 몰입을 담당하는 복내측 전전두피질이 활발해지면 부정적 생각으로 계속 빠져들어 인지 기능의 오류를 일으키고 자살이란 생각에 몰입하게 되며 10분내에 행동에 옮기게 된다고 한다. 복잡하게 얘기했지만 단순하게 말하자면 우울증은 병이고 초기 진단시 회복률이 높은 병이란 것이다. 즉, 빨리 치료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울증은 왜 걸릴까?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은 상대소득가설에 따른 절망감이라고 본다. 즉,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은 가지고 싶은 욕망(욕구) 대비 실제 소유한(가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보는데 역사적으로 조선시대는 신분제도로, 일제 강점기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로 욕망의 제한이 있었으나 역동적인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우리 국민들에게는 욕망의 제한이 사라졌다. 말 그대로 ‘하면 된다’는 성공신화가 사회 저변의 인식이 되었고 그 수단은 특정 사업가를 제외하고는 좋은 대학의 진학이었다. 이것이 사교육 문제를 낳았고 우리의 청소년들은 엉덩이가 뭉개져라하고 열공에 집중하였다. 그래서 절대적인 소득수준은 선진국 수준에 근접하였으나, 상대소득은 다른 얘기였다. ‘해도 안되는’ 상황에 직면하여 절망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부동산을 보면, 우리나라 서울의 소득대비 주택가격비율(PIR; Price to Income Ratio)를 보면 서울의 경우 2022년 2분기 14.8배로 15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집을 살 수 있다는 말인데 총상환능력 평가(Debt to Service Ratio; 소득대비 원리금 상환액비율) 자료를 보면 대출액 2억 초과 차주의 DSR 20% 이하 차주와 20~40% 차주 비중이 각각 38.9%, 28.2%로 주택 구입자중 거의 70%가 구입자금의 DSR이 40% 이내라고 한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는 ‘해도 안되는’ 상황에 대부분의 사람이 주택구입이 불가능하다. 서울의 경우 주택보급률(가구수 대비 주택수)은 무려 93.7% 이나 주택소유율은 83.9%로 일부 부자(전체의 약15%)들이 다주택을 소유하고 있다. 전국 주택 소유자를 연령별로 보면 30세 미만이 11.2%, 30대가 37.7%로 30대가 되면 약 40%가 주택을 소유하게 되므로 60%의 30대가 절망에 빠지게 되니 삼포세대니 오포세대니 하면서 만혼과 저출산이 유행하게 될 수 밖에.... 여기에 더하여 빠른 핵가족화와 독신세대의 증가로 절망감을 정서적으로 공감해주고 돌봐줄 가족이 주변에 없다보니 고독감과 절망감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어려워지고 술이나 중독성 물질에 의존하게 된다. 이 경우 자살 확률은 더 높아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 나라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는 우리의 역동적 압축 성장과 급격한 사회 환경 변화의 결과이고 정신(병)의 치료에 대한 터부감이 가져온 결과로 보여진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고령층에서 어떻게 좋은 죽음을 대비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앞서 이야기한 자살이나 고독사 같은 죽음은 본인이나 남겨진 가족이나 모두 좋은 죽음은 아니라고 하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자살의 유가족들은 이를 막지 못한 참담한 후회와 함께 평생을 죄의식속에서 살아가다 자살의 고위험군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좋은 죽음은 그 반대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모두에 쓴 바와 같이 죽음의 순간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죽음의 순간을 맞이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죽음일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우울증과 자살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기부와 봉사라고 한다. 인류애로서의 기부와 봉사의 효과도 이러할 것인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헌신과 봉사의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며 좋은 죽음의 순간을 위한 기대감과 희망과 기대감도 쌓아 갈 수 있으니 남아도 한 참 남는 장사라 할 수 있다.
그럼 후회 없는 삶을 통한 좋은 죽음의 성취는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이번 시리즈인 인생단상-어떻게 살 것인가 시리즈가 하나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애초에 이번 시리즈의 기획 의도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각 연령별로 필자가 생각하는 후회하지 않을 인생을 위한 삶에 대해서 적었고 이제 독자가 인생을 마무리해 나가야 하는 노년기에 접어 들어 인생을 정리하는 단계에 접어 들었다면 어찌 죽음을 직면하고 준비해야 할지에 대해서 간단히 생각을 적고 이번 시리즈의 대단원을 마무리할까 한다. 이 시리즈의 바로 직전에 쓴 글이 은퇴 이후의 삶에 관한 글이었다. 그 글에서 필자는 은퇴 이전까지는 가족이나 생계를 위한 삶을 살았다면 은퇴 이후에는 자기 자신이 사는 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살라고 권했다. 이는 죽음에 앞서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식일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녹록치 않을 때일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은 횡단면적(Cross-sectional)적으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시계열(Time-series)적으로도 느껴진다. 은퇴 직전에는 사회적으로 높은 직위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은퇴 이후에는 경제적・사회적·물리적(체력적)으로 박탈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즉, 어제의 나에 대한 박탈감과 고독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과 정서적 교류가 무엇보다 중요하나 혼자 사는 1인 단독세대가 많은 요즘 이조차 쉽지 않을 수 있다. 이럴 때는 자발적이고 선택적인 고립을 선택을 해나가야하고 스스로를 그렇게 믿도록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스스로 그렇게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네 직장 생활은 대부분 ‘갑’ 또는 ‘을’의 지위로서 사회생활을 한다. 특히 동양권에서는 이러한 갑을 관계에 의한 사회생활이 많다. 노년에는 이러한 사회생활을 끝까지 영위하지 못한다. 그래서 은퇴 이후에는 자기가 삶의 마지막에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기 위해 사회적 관계가 필요하지 않은 대인관계를 정리하고 진짜 마음이 통하는 친구 2~4명만 남기고 자발적 고립을 선택하도록 많은 사람들이 권고하고 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친구들로 말이다. 문제는 그런 친구나 지인들마저 아무도 없을 때인데 이런 경우 마치 친구와 대화를 나누듯 글쓰기에 집중해 보자. 나의 사후에 누군가 읽어 줄거라는 믿음과 함께 살고 느끼고 숨쉬는 것을 적어보는 것이다. 박탈감과 고독감을 털어버리고 이 땅에 살다간 흔적을 남겨 보자. 노트북도 좋고 종이 쪼가리에라도 열심히 써서 모아두자. 혹시 아는가? 사랑하는 지인이 없다면 사회봉사자나 죽음을 조사하는 사람이라도 읽어 줄지......